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당의 2차 북벌 (문단 편집) ==== 안국군의 반격 준비 ==== 국민당이 [[영한합작]]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사이, 화북에서는 군벌들간의 충돌이 빚어지고 있었다. [[옌시산]]은 안국군이 펑위샹 토벌을 위해 남하한 틈을 타서 제4사단장 [[푸쭤이]]를 파견하여 1927년 10월, 탁주를 공격해 점령했다. 탁주는 베이징에서 불과 10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장쭤린은 즉각 제3방면군 8군 군장 만복린에게 4개 보병 여단, 전차 1개 대대, 공병 1개 중대를 주어 탁주 탈환을 명령했고 추작화에게 중포 1개 대대와 야포 1개 대대를 주어 만복린을 지원하게 하였다. 만복린은 숫적, 화력면에서 우세한 것을 믿고 탁주성을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푸쭤이는 3개월이나 탁주를 사수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허나 3개월의 공선전 끝에 식량과 탄약이 떨어지자 1928년 1월 6일, 성을 빠져나와 만복린에게 투항했다. 만복린은 그를 바오딩의 제3방면군 군단장 장쉐량에게 데려갔는데 장쉐량은 그를 군단 참모장 포문월의 가족 숙소에 기거하게 하며 생활비까지 주고 그의 운신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푸쭤이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톈진으로 달아나 옌시산 휘하로 복귀, 5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옌시산의 4사단은 1월 10일 백유청을 사단장으로 하는 안국군 36사단으로 개편되었다. 탁주를 탈환한 장쭤린은 국민당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1월 25일, 장쭤린은 장쉐량, 장쭝창, 쑨촨팡, [[양위팅]], 저옥박을 소집하여[* 제4방면군 군단장 한린춘은 와병한 상태라서 장쉐량이 3방면군과 4방면군을 동시에 지휘하고 있었다.] 베이징에서 안국군 최고 군사회의를 거행하였다. 장쉐량은 장쭤린의 동의를 얻어 양위팅이 제4방면군 군단장을 겸직하게 했고 바오딩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 회의에서 안국군은 다음과 같은 작전계획을 도출했다. * 1. 장쉐량, 양위팅 소속의 제3,4 방면군단은 대부대가 한단 인마으로 가서 안양의 펑위샹군을 공격한다. 일부는 낭자관, 오태 방면의 옌시산군을 공격한다. 아울러 기회를 엿보다가 산서성 내부로 밀고 들어가 그 주력 부대를 공격해 파괴시킨다. * 2. 장쭝창 부대는 노남[* 산동 이남.]을 지키며 공격에 나서지 않는다. 깊숙이 포진하여 철통같이 지키고 적군의 북진을 막는다. * 3. 쑨촨팡 부대는 제녕 일대를 지키며 장쭝창 부대와 긴밀히 연락하여 노남을 굳건히 지키도록 한다. * 4. 저옥박 부대는 대명 일대를 지키고 좌익에 있는 장쉐량, 양위팅의 제3,4 방면군과 긴밀히 연락하여 적의 북진을 저지토록 한다. * 4. 장쭤샹의 부대는 제3,4 방면군 군단 작전에 호응하여 평형관을 향해 대동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기회를 보아 산서 북부 지역 내부를 공격해 들어간다. 군사회의는 1월 25일 당일로 끝났고 안국군 장령들은 1월 26일 주둔지로 돌아갔다. 2월 16일 장제스와 펑위샹이 카이펑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했다는 소식을 들은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다시 회의를 소집했지만 1월 회의와 크게 다른 내용이 나오진 않았다. 회의가 끝나자 양위팅과 장쉐량 모두 주둔지로 돌아왔고 3월 26일 주둔지에 병력을 배치했다. 4월 1일 장쉐량과 양위팅이 참모처의 병력을 인솔하여 전용차를 타고 바오딩을 떠나 한단으로 이동하여 전선 지휘부를 설치했다. 참모처장에는 사가가, 후방을 책임질 바오딩의 참모장에는 포문월이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